(...)크라우스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매체의 재창안에 대한 사례로 지적한 예술가들은 바로 쇠퇴한 기술적 지지체로부터 문화적 기억과 표현적 가능성을 이끌어내고 기존의 매체 예술에 대한 구별들을 질의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매체를 쇠퇴의 순간에만 재창안의 가능성에 열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미디어와 대립시키는 크라우스의 견해는… (...) 즉 디지털 미디어 또한 영화와 마찬가지로 -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 그 안에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을 포함하는 ‘집적 조건’을 가졌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매체 관념을 넘어서며, 컴퓨터의 구성요소 또한 프로그래밍 알고리즘, 하드웨어, 인터페이스, 네트워크 등으로 분화되는 ‘변별적 특정성’을 가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형태의 안을 바꾸고 채워넣어봐야 도긴개긴이다. 중요한 건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그러니까 빚을 갚기 위해 돈 벌 방법을 계속해서 구상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빚의 사회적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내용의 소설을 쓰느냐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지돈씨?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2017, 158-159.
이처럼 문학의 형식을 혁신하고자 하는 여러 의지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매체에 관한 논의는 (미술에 비해)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주어진 물리적 대상으로서 형태를 변형하는 실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식의 매체 탐구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물질성으로 환원되어 고갈되어버린 것처럼, 내용을 감싸고 있는 형태만을 연마하는 것은 텍스트의 물질성 자체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치 크라우스가 미술의 매체를 물리적 대상에서 그것의 관습과 규칙으로 확장한 것처럼 문학의 매체를 확장한다면 어떨까? 단지 물리적 대상으로서 텍스트가 아니라 내용의 관습과 규칙으로 문학의 매체를 확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문학의 오랜 주제 중의 하나로서 ‘여정의 서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부터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같은 미국적 여정 서사, 혹은 ‹삼포 가는 길› 같은 한국적 여정 서사에 이르기까지 길을 떠나면서 진행되는 서사는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한 ‘서사 형식’이 어떻게 발전하고, 오늘날의 작품에서 어떻게 새롭게 전개되는지 그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의 매체를 실험하기 위해 소설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형태, 즉 매체로 이해하는 것으로 매체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역사와 전통이 문학사에 기입된 정전의 계보에 한정될 이유는 없다. 크라우스의 매체가 잊혀진 과거의 기억을 ‘불현 듯’ 현재에 떠올리는 것이듯이, 문학의 역사와 전통은 정통한 계보에서 벗어난 잊혀진 것일 수 있다. 소위 ‘순문학’에 속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학이 문학의 전통으로 기억될 수 있다. 최근 한국문학에 종종 등장하는 재난상황은 본래 SF소설과 영화의 단골 ‘서사 형식’이다. 모두가 사라진 세계에 남은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인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 전염성 바이러스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길에 사랑에 빠지는 두 소녀의 이야기인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 같은 작품은 장르소설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는 계보에 있지는 않을지라도, 재난과 고립이라는 ‘서사 형식’의 전통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 작품은 그 전통의 관습과 규칙을 반영하고, 나아가 그 규칙을 새롭게 창안함으로써 또 다른 성취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다.
소설은 결국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의 방법론이 문학의 비평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의 형식의 재료로서 매체에 대한 개념을 바꿈으로써, 즉 문학의 내용을 매체로 이해함으로써, 문학 비평은 개별 작품론의 비평에서 나아가 문학의 매체에 대한 방법론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로써 문학 비평은 “지속적인 텍스트 해석학”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서사를 벗어나 어떻게 매체를 전유해 새롭게 써볼 수 있을까요?
문학사의 대담한 시도를 위해 참고 할만한 시도들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